(4)반드시 완주를 해야만 하는 이유
안산마라톤 클럽에서 자원봉사하는 공식적인 CP.
절편을 비롯하여 건포도와 음료수 등 맛난 간식들을 배불리 먹고
이제는 소화도 시킬 겸 왕창3거리까지 걸어서 간다.

삼거리를 지나 저 멀리 왼편의 양자산과 오른편의 앵자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사이로 소박하고 한적하게 자리 잡은 시골마을들을 지나며
은근히 오르막 진 그곳을 아까의 주법들을 되새기며 달려 올라간다.

달리던 K가 말한다.
자기는 오늘 반드시 완주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그는 딸만 있는 집의 맏사위인데
투병중인 장인어른께 울트라마라톤 완주의 선물을 드리면서
왕성하고 힘이 넘치는 기를 불어넣어 드려
그 기를 받고 장인어른이 쾌차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단다.
떠나오기 전 장인어른의 손을 잡고 그렇게 약속했단다.
"반드시 완주하고 와서 기를 팍팍 넣어드리겠습니다." 하고.....

그의 말을 듣고 감동한 나는
아까 반환점까지만이라도 동반주하겠다는 생각을 바꾸어
오늘 반드시 K와 함께 완주해야겠다고 다짐한다.

CP에서 에너지를 보충해서 그런가?
아니면 완주에 대한 의지가 불타올라서 그런가?
은근한 그 오르막을 잘 달려 올라서 항금리 3거리를 돌아
이제는 절대고독의 언덕을 올라 갈 차례.
(김 학윤 원장의 제1회 대회 완주후기에 나오는 표현인데
저작권료없이 멋대로 사용합니다. 너무 좋으니까....)

밤하늘의 별도 바라보며 두런두런 올라가는데
갑자기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반가운 반딧불이 우리를 맞이해 준다.
수년동안 천진암 대회에서 보지 못했던 소중한 반딧불.
청정지역에서만 산다는 반딧불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런지 코끝에 스치는 밤공기가 너무나 청량한 느낌이다.
절대고독을 음미하면서 오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반딧불을 벗삼아 동반주를 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오르막을 올라서서는 다시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풀어주고.....
컨디션이 어떠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한다.
아까 얘기했던 내리막 주법을 내가 다시 시범을 보이며 앞장을 서고
K는 뒤따라 열심히 달려온다.
조금 페이스를 늦추어 달리긴 했어도
그동안 훈련한 발목주법이 역시 효험이 좋다고 생각하고
내리막을 거의 다 내려 왔는가 했더니
갑자기 K가 장딴지가 뒤틀리며 쥐가 난다고 먼저 가라고 한다.
나더러 또 먼저 가라고?
그럴 수는 없지. 이제는 어쨌든 함께 갈 수밖에 없어.

우리는 조금 걷고 스트레칭도 해주고
조금 가다가 마을 버스정류소에서 마사지도 하고....
아까 내가 얘기한 발목주법으로 달리니까 무릎이 덜 아파서 좋긴 했는데
평소 훈련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달리다보니 장딴지에 무리가 간 모양이다.
이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어설픈 충고가 되레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네.

나는 미안하다고 하고
K는 아니라고 자기가 연습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자기 때문에 나도 페이스대로 뛰지 못해 오히려 자기가 미안하니 또 먼저 가라고
나는 아니라고 어쨌든 끝까지 함께 가겠다고 티격태격.

나는 또 다른 주법을 제안한다.
페이스를 한껏 늦추어 허벅지를 들어 올리면서
설렁설렁 가는 일명 설렁주법.
요지는 아프고 고통이 있는 부위인 장딴지를 쉬게 하는 것.
그것이 그래도 효험이 있는지
쥐가 나는 것은 좀 수그러들고 그런대로 달릴만하다고 한다.

그렇게 고비를 넘기고 새벽잠이 깊이 든 시골마을을 지나고
또 다시 힘겨워하는 K
그렇다면 이제는 에너지를 보충해줄 시간이지.
마을 정류소에 둘이 앉아 빵과 파워젤을 먹고
스트레칭과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일어섰다.
어쨌든 가야만 하는 길.

K가 묻는다.
이렇게 가도 반환점에 2시까지 갈 수 있느냐고.
K는 사전에 완주계획을 짜면서
반환점에 2시까지는 가야만 완주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글쎄...페이스만 유지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남은 거리와 남은 시간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 몸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내 몸이 말하는 대로 가다보면
오히려 달리기가 편해지고 후반에 페이스도 올릴 수 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내 몸이 가자는 대로 가라고 조언한다.

이제는 국도변을 따라 달리는 차량들과 씨름을 해야 하는 재미없는 구간.
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닮은 울트라 주로가
항상 달리기가 좋은 구간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순응하며 가는 게
순리에 맞고 내 몸도 그만큼 편안해지는 거지.

한참을 달리다 조그만 고개를 넘는 곳.
달리다 걷다가 하던 우리는 질주하는 차량을 피하여
비좁은 갓길 옆의 수로로 내려서서 걷는다.
반대편으로 건너가자고 내가 제안한다.
역주행을 하는 게 울트라 주행법으로는 보다 안전하기도 하고
우리는 이제 내리막이라 뛰어갈 텐데
반대편은 오르막 주로가 있어 보다 넓은 길이니까.

내리막을 다 내려서니 역시 이쪽도 갓길이 협소하기는 마찬가지.
K를 앞세우고 우리는 일렬종대로 달린다.
선두권은 벌써 우리를 스쳐지나갔고
이제는 제법 많은 주자들이 벌써 반환점을 돌아오면서
울트라 힘! 을 서로 외치며 지나쳐간다.

앞서가는 K의 페이스가 다시 빨라지기 시작한다.
신이 난 나는 바짝 따라붙으며 달려가려니 나도 이제는 힘에 부친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 병산리 3거리로 들어서서 한숨을 돌린다.
페이스가 상당히 빠르더라고 했더니
반환점을 돌아오는 주자들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페이스가 빨라졌는데
장인어른을 머리에 떠올리며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단다.

이제 작은 오르막 두 개만 넘으면 반환점이라고 했더니
또 오르막? 하면서 조금은 지친 표정.
다시 K를 독려하며 가벼운 오르막 구간은 뛰어오르고
가파른 오르막은 걸어주면서 가다보니
저 멀리 반환점의 환한 불빛이 우리를 환영해준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8시간을 조금 넘긴 시간.
나도 아까는 2시까지 가기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K가 열심히 달린 덕분에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