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프롤로그
천진암 대회는 나에게 울트라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울트라마라톤 첫 완주의 기쁨을 안겨 준 곳이고
울트라에 대한 내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

나는 울트라마라톤을 달리면서
울트라마라톤을 교향곡에 즐겨 비유하여 표현해왔는데
천진암 대회는 그동안 나에게
프랑스 산사람들의 노래에 의한 교향곡, 미완성 교향곡, 신세계 교향곡
그리고 첼로와 피아노에 의한 이중주 등의 추억을 안겨 주었다.

이번 대회는 나에게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되새기게 해주었다.
작곡가에게 가장 소중한 청각을 잃고 유서까지 쓰며 몸부림쳤던 베토벤.
그리고는 그 운명과 맞서 싸워 이기며 악성으로 우뚝 섰던 베토벤.
그 베토벤이 마치 자서전처럼 써내려간 운명 교향곡.
교향곡 역사상 아니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교향곡.
"따따따 딴~" 하는 운명의 노크소리로 시작된 음악이
집요하리만치 한 가지 모티브를 갖고 2악장 3악장을 지나고
마지막 4악장에서는 승리의 나팔처럼 울려 퍼지는 그 음악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나도 베토벤처럼, 그의 음악처럼
"고통을 통한 승리"를 하고야 말겠다고 외치며
새 힘을 얻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이번에 나와 동반주를 하게 된 K에게
울트라마라톤 첫 완주의 기쁨과 함께
이 음악이 주는 의미와 느낌을 담아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그대는 베토벤처럼 "고통을 통한 승리"를 한 거야.
힘겨워 지치고 고통스러울 때 얼마나 그만 두고 싶었던가?
그러면서도 그대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얼마나 집중하고 열중하였던가?
도저히 뛰지 못하겠다고 그냥 걸어가겠다고 하던 그대가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나 나를 앞서 무서운 스피드로 달려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거룩하기까지 하여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눈물을 흘렸다네.
그 모습은 진정 너무나 아름다웠어.

그대는 승리의 월계관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거야.
베토벤의 음악처럼 승리의 나팔을 드높이 울려 퍼지게 한 거야.
그대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당당한 울트라마라톤 완주의 선물을 받고
장인어른께서도 반드시 쾌차하실 거야.

그대의 장인어른께서 쾌차하시어
이번에는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를
기쁨에 겨워 부르는 그대의 모습을 기대해 보면서
그날의 감격을 잔잔히 되새겨보려고 한다네.

[2]운명 교향곡을 닮은 소중한 우리의 완주를 되돌아보며

(1)성지순례 마라톤에서 이어지는 인연
3주 전, 오래 숙성된 와인 맛을 흠뻑 느끼게 해준
칠전팔기의 성지순례 울트라마라톤 완주.
그리고 지난 주, 몇 시간의 알바 끝에 비록 미완에 그쳤지만
오 승권 아우를 비롯한 네 명이서 작당하여 다녀 온 설악 태극종주.
고수들과 함께 다니면서 나도 고수가 된 양 우쭐대다가
미처 몸이 다 회복되기도 전에 참가한 천진암 대회.

몸이 무거운 느낌은 있었으나 걱정과 우려와는 달리
평소보다는 다소 빠른 페이스로 오르막도 기분 좋게 올라채며
천진암 계곡을 왕복하니 역시 평소보다 빠른 7분 페이스를 보이고 있다.
그러는 사이 분당마라톤 클럽 회원 몇이서 동반주를 했으면 한다.
첫 울트라마라톤 도전인데 나만 따라가면 완주는 문제없다나 뭐라나....
글쎄....나는 느리게 달리기로 정평이 나있는데.....
완주 예상시간을 묻기에 14시간 안에만 들어와 볼 생각이라고 했더니
다소 페이스가 늦다고 생각하는 눈치가 보인다.
어쨌든 함께 달려보니
역시 마라톤 기록이 나보다 고수인지라 가볍게 잘 달린다.

이윽고 어둠이 내리고 팔당호반을 따라
개구리합창도 들어가며 25킬로를 조금 못 미친 귀여리를 지나갈 즈음
평소와 다름없이 서서히 몸이 무거워지며 지쳐가고 있는데
왕성한 체력활동 덕분에 변의가 느껴진다.
그 주자들을 먼저 보내고 시골의 어느 밭가에 시비를 한 후
이제는 홀로 가는 길.

조금 가다가 구리마라톤 클럽에서 자원 봉사하는 차량을 만난다.
클럽 회원이 아닌 나에게도 기꺼이 음료를 나누어 주신다.
감사~~합니다.~~~
콜라를 한 잔 더 받아 들고 가다가
내친 김에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 에너지를 보충해준다.
불필요한 건 빼주고 필요한 건 채워 넣으니 몸도 덩달아 가뿐가뿐.

앞서간 주자들을 따라잡으며 달려가고 있는데
저 멀리 한 주자가 혼자서 달리고 있다.
서서히 따라붙으며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 주자가 바짝 따라붙는다.
그래. 이 한밤중에 이렇게 같은 주로를 함께 달리는 것도 인연이겠지....하며
서로 통성명을 하고 신상명세서를 주고받는다.

그는 강동마라톤 클럽의 K
마라톤 4회 완주 후에 울트라마라톤 첫 도전.
나이는 나보다 열한 살 아래인 마흔여덟.
(나도 저 나이쯤에 마라톤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완주에 대해 기대반 걱정반이면서도 완주의지가 엿보였다.

강동마라톤 클럽이라면 울트라를 하면서 알게 된 권경상 갑장이 고문으로 있고
지난번 성지순례 울트라를 달리면서 앵자봉을 넘을 때
동반주를 했던 주자가 있어 조금 친숙한 클럽이었다.
그런데 동반주를 했던 한 주자와 K는 친구사이여서
그 친구를 통해 K는 나를 풍문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사실 나는 달리기에 대한 내 소신 때문에 동반주를 즐겨하지 않는 편이고
동반주를 하더라도 내 방식대로 하는 편이다.
그러기에 아까 분당마라톤 클럽 회원이 동반주를 청했을 때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인데
이제 그 주자들은 앞서 간 상황에서
그 주자들이야 내가 없어도 충분히 완주할 수 있는 수준이고
지금 K는 완주의지는 있지만 완주를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성지순례에 대한 내 애착 때문일까?
아니면 바로 이 천진암 대회에서 나의 첫 울트라완주의 기억 때문일까?
조금이나마 그의 완주에 보탬이 되어보자고 결심한다.
처음 이 대회를 신청할 때는 그동안 훈련했던 일명 발목주법을
다시 한 번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뭐 대수랴.
그래. 오늘은 K가 완주할 수 있도록 조금만 도와주자.
아니면 반환점까지만이라도 함께 달려보자.

이렇게 시작된 나와 K의 동반주는 이후 골인까지 함께 하게 된다.
(분당마라톤 클럽의 회원님!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2)울트라에 대한 잔소리 주저리주저리
역시 첫 대회 참가여서 그런지 벌써 무릎이 아프다고 한다.
아니 벌써!
마라톤을 하지 않는 지인들을 만나면 첫 질문은 언제나
"당신의 무릎 관절은 안녕하신가?" 이다.
"당근이지. 오히려 더 탄탄해지고 있지."
라고 해도 그들은 믿지 못하는 눈치.

나는 K에게 무릎관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관절이 아닌)근육으로 달려라."
"허벅지 뒤쪽 근육과 허리를 중심으로 달려라."
"뒤꿈치 착지를 하며 구르듯이 달려라."
"보폭을 짧게 하고 잰걸음 주법으로 달려라."
"천천히 달려도 자세를 유지하다 보면 저절로 빨라진다."
"내리막도 마찬가지.(무릎 쪽에 하중이 실리지 않도록.)"하고 조언해준다.
고수들이야 코웃음 칠 일이지만
초보 울트라 러너에겐 절실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참을 달리던 K
제법 잘 달리기에 물어보니 무릎이 훨씬 나아졌다고......
잔소리가 때로는 효험이 있군.

그런데 이제는 헉헉 거리며 따라오는 느낌.
평소 비염이 있어 코로 숨쉬기가 곤란하여 더 숨이 차다고 한다.
그래도 입으로만 숨 쉬는 것은 더 힘들어진다고 생각한 나는
다시 호흡요령에 대해 조언해준다.
"(힘들어도)코로 숨 쉬어라."
"규칙적으로 들이쉬고 내쉬고 힘들면 심호흡 한번 하고 또 그렇게 계속...."
"호흡에 페이스를 맞춰라.
그러면 몸이 편안해지고 오버페이스도 하지 않으니까..."

힘들어 하면서도 코로 숨 쉬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기 좋다.
페이스도 호흡에 맞추어 조금 늦추어서인지
아까보다는 한결 숨소리가 고른 것 같고 달리기도 편해진 것 같단다.

내친 김에 페이스 유지 요령도.....
"초반에는 천천히 달려라. 오버페이스는 레이스를 망친다."
"네거티브 스플릿이야말로 마라톤의 진수를 보여준다.
8~90킬로를 달릴 때 지금보다 빠른 페이스로 달리는 맛을 즐겨라."
"워크 브레이크를 잘 활용해라."
"휴식도 달리기 못지않게 중요하다.(그러기에 9부 능선에서도 쉬어가야 한다.)"
"지치기 전에 에너지를 보충해주어야 한다."
"후반전에 지쳐있어도 에너지만 보충하면 달릴 여력이 있기 때문에
내 몸을 신뢰하고 몸의 조화를 유지하도록 해라."

그리고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내 몸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내 몸이 말하는 대로 가라."
"조화로운 달리기 즉 runner's 하이를 느끼며 달려라."
이름 하여 울트라교향곡의 개념까지 내 달리기의 소신을 피력한다.

K는 알쏭달쏭 하다고 하면서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얘기하면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핵심적인 내용들은 복창을 하면서 성실한 학생처럼 경청을 한다.
그리고 내 나이 때문에 그런지 자꾸 선생님이라는 거북한 호칭을.....
티격태격하다가 말았는데 대회가 끝나고 나면 바꾸겠다고.....
선배님 또는 형님으로.....

(3)배려심이 돋보이는 K
이제는 제법 나와 호흡을 맞추어가며 잘 달려가고 있는데
나란히 달리는 그가 자꾸만 내 앞으로 랜턴을 비추며 달린다.
내 랜턴의 불빛이 약해졌던 모양이다.
성지순례 때도 사용하고 태극종주 때도 사용해서 그런 것일까?
어쨌든 나의 불찰이고 준비부족인데 어찌 할 것인가?
이제는 아예 내 랜턴을 끄고
하나의 랜턴에 의지하여 함께 달리는 진정한 동반주가 되었다.
(나는 괜찮다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고집스레 내 앞으로 랜턴 빛을 밝혀 주어서 참 고마웠어.)

남한강변의 풍치도 바라보며 즐겁게 달려가고 있는데
"과일 들고 가세요." 하는 소리에 가보니
아까 우리를 지나쳐 간 수원마라톤 클럽의 김 화문, 나 영숙 주자 등이 보인다.
수원마라톤 클럽이야 아는 사람도 많으니
염치불구하고 얼른 달려들어 맛난 과일들을 함께 먹으니
목의 갈증이 가시며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다.
감사~~합니다.~~~

자, 이제는 맛난 과일도 먹었으니 다시 출발.
숨소리가 거칠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꾸준한 페이스를 유지해주고
오르막도 중간지점까지 뛰어올라주고.....
내리막을 뛰기 전에는 스트레칭을 하여 근육을 풀어준 다음
우리를 추월해 간 김 화문, 나 영숙 주자들에게
"우리는 쉬었으니 10% 더 빠르게 달립니다." 하면서 다시 추월해가고...
K도 뒤쳐지지 않고 잘 따라와 주어
그렇게 오르막 내리막이 섞여있는 재미있는 구간을 지났다.

남한강 최고의 풍치를 자랑하는 곳에서는
내일 아침 혹시 나와 함께 달리지 못하더라도
그 풍치를 잊지 말고 꼭 감상해 보라고......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고.....일러주고는 달려가는데
K의 페이스가 점점 올라간다.
달릴 수 있다면 좋지. 내 페이스도 따라 올라간다.

모처럼 몸에서 열도 나면서 신나게 달리는데
좀 쉬었다가 가잔다.
"나는 페이스가 빨라지기에 뛸만한 줄 알았지."
"선생님(또 그 놈의 선생님....)페이스가 빨라지기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달린 거죠."

그래. 이것이 바로 잘못된 동반주의 표본이지.
함께 달려보면 자기도 모르는 호승심이 발동하여
두 주자 중 컨디션이 좋은 쪽의 주자 페이스를 따르다보니
결국 자기 페이스를 잃고 오버페이스 하기가 쉽지.
게다가 옆 주자를 신경쓰다보면 자기 몸을 돌아볼 수도 없고....
그래서 동반주는 서로에 대한 배려가 참 중요한 게지.

K는 자기 때문에 내가 내 페이스대로 가지 못한다고 생각하고는
자꾸만 먼저 가라고 한다.
반환점까지는 어떻든 함께 가겠다고 하고는
다시 달려 35.4킬로에 있는 중간 CP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