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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트라 첫 완주기
ㆍ글쓴이 : 서범석 (seobs05@gmail.com)   ㆍ조회 : 1470  
ㆍ등록일 : 2012-05-23 13:32:22  ㆍIP : 125.188.148.4

<울트라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퇴촌면 광수중학교 여기저기에 걸린 현수막의 문구들을 그렇게 읽었다. 울트라의 세계에 들어선 울트라전사들. 이제 막 ‘실재의 사막’에서 빠져나와 ‘신들의 세계’로 향하는, 황혼과 함께 저 편 산속으로 사라질 전사들의 마당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 나는 ‘삶을 물처럼 욕망해야 하지만 죽음을 포도주처럼 마셔야 한다!’. 그래야 완주할 수 있는 경기, 학대에 가깝게 몸을 극한으로 밀어부쳐서 몸의 가치를 확인받는, 기꺼이 생명을 걸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자각으로 루틴한 삶을 이어가는 역설의 현장이다.

올해로 마라톤 3년차, 울트라는 첫 출전이다. 두려움, 설렘, 긴장, 2010년 가을 첫 마라톤풀코스를 위해 잠실운동장 앞 도로에 섰을 때 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땐 그래도 32킬로까지는 뛰어보았다. 지금은 42킬로미터까지가 내가 뛰어본 최장거리다. 미지의 거리, 미지의 세계가 더 멀고 길다. 미지의 거리와 세계는 내 몸이 경험하지 못한 것일 뿐, 정작 출전을 결심한 나는 내 몸을 모른다. 나는 몸을 모르고, 몸은 100킬로미터라는 거리와 세계를 모른다. 내가 단지 아는 건, 내 힘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힘은, 나의 에너지는 실험실의 비이커에 담긴 용액처럼 정확히 측정된 양일뿐,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래서 생각하는 것은 뻥튀기다. 밀도를 낮추는 것, 42킬로미터를 달리는 에너지를 100킬로미터로 고루 분산시키는 것이다. 최적의 속도, 최적의 움직임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마부여, 말을 재촉하지 말아요- 안단테 칸타빌레>

 6시 정각, 출발이다. 실재의 사막에서 신들의 황혼으로 향하는 나팔소리는 발퀴레가 어울린다. 하지만 거기에 악마성은 없다. 오히려 악마성을 걸음걸음 즈려밟는 길이다. 선 수행의 행진이다. 동생과 함께 나란히 출발했다.

“90km까지는 나를 버리고 가면 안된다” 다짐을 받는다.
“왜요? 90km 이후에는 내빼시려고?”

 동생은 천진암에 두 번째 출전이고 광주마라톤클럽 소속이라 길을 잘 안다. 사실 동생이 아니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다. 6분~6분 15초 정도에서 달리자고 한다. 하지만 난 아직 페이스가 익숙하지 않다. 매 km마다 시계를 봐야만 페이스를 확인하고 안정을 찾는다. 아직 감각만 믿을 단계까지는 되지 못했다. 천진암을 향해 완만하게 오른다. 배가 고프다. 점심을 먹은 지 5시간이 지났다. 채 5km도 오지 않았는데 허기를 느끼다니, 낭패다. 급하게 영양갱과 초코바를 꺼내 먹는다. 달리며 3개를 연거푸 먹었더니 좀 살만하다. 1차 반환점을 지나 내리막을 가볍게 달린다. 가볍다. 상쾌하다. 봄바람에 꽃잎 흩날리듯, 구름에 달 가듯, 시냇물에 나뭇잎 떠가듯 가벼워 좋다. 리듬을 타고 몸이 절로 움직인다. 이건 마치 스케르초다. 인생의 휴가다. 그래, 이렇게만 달리는 거야. 급할 것이 없어.

 <구비구비 길따라>

분원리를 지나 한강을 따라도는 길은 아름답다. 다른 수사가 필요없다. 굽이굽이 아름답다. 길따라 펼쳐지는 마을도, 산도, 강도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난 길이고 길따라 이어지는 삶이다. 마을과 마을의 간격, 곧은 길과 구비 길의 간격과 반복이 우리네 삶이고, 정서라 아름답고, 편하고, 그래서 진리다. 언덕의 끝도 시야에 있고, 굽이의 끝도 시야에 있다. 개활지가 주는 공허함도 먹먹함도 없다. 꽉 차게 한국적이다.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진리다. 나는 그 진리를 종교적으로 믿는다. 그리고 언제나 회의한다.

  벌써 걷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다 걱정스럽다. 갈 길이 먼데 이 정도 언덕에서 걷는다면..... 나는 마음이 급하다. 준비한 먹거리를 모두 먹어치웠다. 보급지점까지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 분원리 마을 슈퍼에 들러 양갱을 샀다. 부드러워 달리면서도 먹을 수 있어 좋다. 물도 보충을 했다. 저축을 하고 나니 걱정거리가 사라졌다. 몸의 이상신호도 없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레이스다.

  분원리에서 1차 보급지점까지는 강을 끼고 구비가 돌고 야트막한 언덕이 이어지는 코스다. 지루함도 없고, 근육의 긴장과 이완, 호흡의 강약이 조절되어 좋다. 동생이 속한 광주마라톤클럽의 일요일 훈련코스라고 한다. 나 역시 이런 곳이 좋다. 그래서 서울에 머물 땐 언제나 남산북측순환로에서 뛴다. 빨간 불빛들이 길을 따라 깜빡거린다. 하나 혹은 서너개가 몰려다닌다. 나는 동생과 동생의 동료, 이렇게 셋이 무리를 이루고 달리고 있다. 다른 무리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초여름의 그믐날을 맞이하고 있다. 목을 축이느라 걸으면 이내 몇몇의 불빛들이 앞서가고, 언덕을 오를 땐 대개 몇몇의 불빛들을 밀어내며 나/우리는 1차 목적지 보급지점을 향하고 있다. 마지막 언덕을 내려와 평지를 달리고 있을 때, 조금 힘에 부치는 느낌이 온다. 5분 45초, 지금 페이스가 그쯤 된다고 동생이 말한다.

  <콜라, 김밥, 그리고 담배 한 대>

  두달전쯤 일이다. 10여년전 어금니의 충치를 치료한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불편하기는 했지만 아프진 않아서 그럭저럭 지냈는데 분원리를 지나면서부터 심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달리는 데 왠 치통? ‘러너스하이에서 온다는 엔돌핀은 왜 분비가 되지 않는거야’, ‘치통 때문에 혹시 다리나 혹은 다른 부분의 통증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닐까’, ‘월요일에 치과에 데려다 줄테니, 오늘 하루만 참자’. 예기치 못한 복병, 치통을 만나 잡스런 생각이 겹쳐 피곤하다. 진통제라도 한 알 준비할 걸. 치통이 아니라면, 아마도 난 거리와 시간의 대응, 그 계산에 분주했을 것이다. 지금 몇 km를 달렸고, 경과시간과 남은 거리, 그리고 앞으로 유지해야할 페이스 따위....하지만 치통으로 뇌의 연산기능은 마비되었다.

  1차 보급지점에 도착했다. 36km? 확인을 받고 콜라를 마시고, 김밥을 쑤셔 넣는다. 먹고 마시는 것은 단지 공급이다. 찌꺼기를 거의 남기지 않고 바로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는 혈관주사를 한 방 맞고 뛸 수 있다면 기꺼이 소매를 걷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삶이 어디 그것만으로 충족되던가? 난 커피를 타고(기억이 가물하다),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 걸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11시간 동안 딱 3개피만 피우자, 하고 준비해 왔다. 동생은 시간을 말한다. 잘하면 58km 반환점까지 6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더 뭐라고 말했지만, 내 귀엔 들리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서는 거리와 시간이 대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단지 11시간 20분에 골인하면 그만이야. 그게 오늘 내 목표일 뿐이야. 36km를, 58km를 몇 시간에 통과해야 11시간 20분에 골인하는지 알 수 없단 말이지. 지금 내가 힘든 건 맛있는 커피를 즐길 수 없는 치통일 뿐...

하지만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밤길을 걸으며 지친 몸으로 담배 한 대를 피우니 절로 ‘행복하다’. 이 보다 더한 기쁨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불을 끄고 배낭 버클을 채운다. 다시 달린다. 처음 가보는 길이다. 지금도 일년에 수십번씩 1차 보급지점이 있는 88번 지방도를 따라 광주-양평을 다니지만, 그 길을 벗어나 앵자봉쪽 산을 향해 난 길을 가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길은 가늘고 길다. 어둠이 길게 드리우며 길을 더 길게 늘여놓았나 싶다. 동생의 동료가 처지고 있다. 앞에서 달리는 동생은 그걸 모르고 있다. 호흡이 맞는 동반자가 생겨, 여전히 세 명이 달리기 있기 때문이다. 쉼없이 달렸다. 호흡이 아까워서, 질서를 깰 수가 없었다.

동생이 멈춘다. “이제부터 가파른 언덕입니다. 에너지 보충하고 가야죠” 하며 배낭에서 방울토마토를 꺼낸다. 잠시 있으니 동생의 동료가 온다. ‘걷자, 뛰자’ 잠시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결론 없이 다시 배낭을 멨다. 주로에 들어섰지만 뛰는 사람이 없다. 몸은 합의하고 있었다. 긴 언덕을 빠르게 걸었다. 모두가 걷고 있었다. 단 한명, 등에 222울트라라고 쓴 흰 옷을 입은 여성, 그녀 홀로 뛰면서 우리를 추월해 갔다. 빠르게 걷은 것만으로도 숨이 찬데.....

 고개는 생각보다 길고 가팔랐다. 걸으니 마음이 급해졌다. 몸은 살아난다. 다시 시동을 건다. 그녀를 다시 추월했다. 한달음에 50km 지점쯤으로 추정되는 슈퍼에 멈췄다. 물을 보충하고 드링크 한 병으로 갈증을 풀었다. 다시 담배 한 대....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그러나 이 행복한 여정에, 이 치열한 전투에 담배 한 대가 주는 달콤함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래, ‘죽음을 포도주처럼 마셔야 성공할 수 있다’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좀 늦었는데요, 6시간에 반환점까지 못 가겠는데요.” “11시간대에 골인할 수는 있고?” “그건 충분할 거 같은데...” “그럼 됐지 뭐....가자”

 주로가 불편하다. 차는 많고 길섶은 좁다. 길가에 바짝 붙어서 묘기하듯 달린다. 이런, 벌써 선두주자가 돌아온다. 하나, 둘, 셋....주로는 양평을 코 앞에 두고 곤지암쪽으로 향하는 마을길로 들어선다. 역시 처음 가는 길이다. 반환하는 주자도 늘어났다. 무리를 이루고 지나간다. 열, 스물.....아, 이게 아닌데...이래 가지고는 11시간 20분에 들어갈 수 있나, 불안감이 엄습한다. 너무 나태하게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동생이 나를 안심시킨다. “후반이 몸이 더 가볍던데요, 후반에 빼죠.” 과연 그럴까? 반환점에 도착했다. 국밥, 맛있다. 맛있는데 맛을 미처 느낄 겨를도 없이 우겨넣고 있다. 이제 42킬로만 가면 된다. 풀코스 출발선에 섰다. 4시간 30분에만 달려주면 좋을텐데.... 커피 한 잔을 타고 길가에 쭈그려 앉아 마지막 남은 담배 하나를 피웠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안삼아 달리면 된다. 동생이 말한다. “아까 그 슈퍼까지 쉬지 말고 달리죠.” 나는 답한다. “물론!”

  밥 먹느라 10분쯤 쉬었을까? 정말 몸이 가볍다. 불빛들을 하나둘씩 추월하고 있다. 빠르다. 빠르니 가볍다. 이 페이스라면 5분 30초, 아니 그것보다도 빠른 거 같다. 내리막은 내 몸에 가장 익숙한 4분 50초 페이스다. 60km를 달리고도 계속 이렇게 달릴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순식간에 8km를 달려, 앞서 쉬었던 슈퍼로 돌아왔다. 다시 물을 보충하고 드링크 한 병을 마셨다. 난 의자에 앉아 있었고, 동생은 슈퍼에 들어가서 물건을 사가지고 나왔다. 슈퍼에서 보급하던 2번을 그랬으니 서바이벌 기준으로 난 규칙을 위반했는지도 모른다. 나/우리가 추월해왔던 사람들이 우리를 추월해가고 있다.

  <불빛들을 다 잡자-알레그로 디 몰토>

  이제 남은 거리는 32km 남짓이다. 나는 거리만 생각하고 있다. 시계를 차고 있고, 가끔 시계를 들여다보지만 그건 마라톤을 할 때의 습관일 뿐.......의미가 없다. 나는 지금 계산능력이 없다. 오로지 동생이 들려주는 정보에 의지하고 있다. 지금 이 상태로 가면 골인 시간이 어떨 것이라는..... 10시간대 골인은 포기했다. 그리고 그건 내 목표도 아니었다. 동생도 그럴 능력은 아니다. 우린 서로 치열하게 끌고 밀며 지금 동반주를 하고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동생의 정보를 종합하면 지금부터 열심히 뛰어야만 11시간 초반대 진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뛰어야 한다. 앞에 보이는 불빛들은 다 잡아야 한다. 뛰자, 뛰자.

  다시 버클을 채웠다. 반 걸음, 반 걸음, 나는 반 걸음을 생각했다. 동생과의 거리를 반 걸음으로 생각했다. 그 이상을 벌리면 안된다. 바짝 붙어서 밀어붙이고, 동생이 처지면 반 걸음 앞에서 끈다, 그래야만 목표시간에 도착한다. 나도, 동생도 몸 상태는 좋다, 의기충천이다. 출발점으로 생각한다면 32km는 얼마든지 밀어부칠 수 있는 거리다. 바짝 붙었다. 호흡을 느낄 수 있도록, 그 호흡이 새나갈 틈이 없도록. 불빛들을 잡고 있다. 하나, 둘, 셋.... ‘222울트라’ 여인을 또 잡았다. 오늘 하루에 저 여인을 몇 번을 잡았는지 모른다. 단 한번 추월당한 것 같은데 잡은 것은 대여섯번은 되는 듯 싶다. 내가 쉴 때 마다 저 여인은 앞서갔던 모양이다. 오늘 주로에서는 이번 조우가 마지막이고 싶다.

  오면서 걸어야만 했던 마의 고갯길을 앞두고 동생이 말을 건다. “뛸까요, 걸을까요?” 나는 답한다. “되는 대로....” 약한 틈이 조금만 보이면 내 속의 악마는, 비겁함은 말을 걸어온다. ‘그만 멈추시는 것이 좋을걸요’하고 말이다. 동생의 말은 경쾌했지만, 내가 무너지는 순간 동생도 무너진다는 것을 안다. 슈퍼 이후 40분 이상을 거칠게 달려온 그의 호흡이 말하고 있다. 그도 지쳤다. 물론 나도. 그러니 우린 지금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될 합리적인 이유가, 너/나가 용인할 이유가 저 하늘의 별들 보다 많다! 경사는 또 얼마나 심한가? 봐라, 모두가 걷지 않는가? 용기를 내는 것은 혼자서 할 수 있지만, 퇴각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에는 동의를 필요로 한다. 그건 비겁한 것이 아니라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합의. 그래서 사회란 비겁자들의 커뮤니티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딱 반 걸음, 그렇게만 끌고 가자. 바람보다 먼저 눞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자. 지치기 전에 쉬고, 퍼지기 전에 일어나 뛰자! 그 호흡을 가늠해야만 한다. 내 호흡뿐만 아니라 동생의 호흡까지. 결국 멈췄다. 물 한 모금을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으며 속보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걷기다. 걸으며 걷는 사람들을 추월했다. 나는 걷는다, 뛴다 하지만 결국 에너지는 속도로 귀결한다. 결국 달리기와 걷기의 구분이란 m/s에선 무의미하다. 중력에 저항해봐야 소용없다. 그저 빨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걷든 뛰든 구르든.

  <몰아>

  도로의 방향표시 기호들이 늘어선 것을 보니 고갯마루에 올라온 것 같다.
“다 왔네”
“좀 더 가야 될 걸요”
올 때 기억으로 정상부가 맞다. 조금 더 걷고 싶다는 뜻인가? 좀 속도를 늦춰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보았다. 불빛들이 보이지 않는다. 뛰면서, 심지어 걸으면서 추월했던 불빛들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경사에 걸음을 내 맡긴다. 동생은 내리막이 힘들다고 말한다. 나는 묻는다. 얼마나 남았냐고? 동생이 얼마라고 답한다. 나는 푸념한다. 아직도 그렇게 많이 남았냐고?

  나도 힘들다는 사실을, 그러나 이렇게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제 하프만 뛰면 된다고, 힘들지만 나도 뛰고 있으니, 너도 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은 필요 없었다. 동생도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거친 호흡이 말하고 있었고, 내리막이 힘들다고 말하는 건, 정말 힘들다는 얘기니까. 돌아보면 그 무렵이 동생에겐 가장 힘들었던 시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외면했다. 난, 가야했다. 나는 달렸고, 동생은 바짝 붙었다. 혼자서는 지옥문을 노크할 수 없지만 둘이서는 할 수 있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소외될 수 없다는, 커뮤니티에 속해야 한다는 집단본능과 같은 것이다. 내가 끌면 숨이 턱을 넘지 않는 한 동생은 따라온다. 하지만 딱 반 걸음만 끌자,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목표시간에 도착해야 했고, 이 지독하고 징그러운 게임을 당분간 잊고 싶었다. 만약, 목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난 다음날로 100km 울트라마라톤 일정을 검색하게 될 런지도 모른다.

내리막을 다 내려오고 나서도 20분을 더 달리고서야 겨우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반가움이란! 그 무렵 나와 동생은 광주-양평간 도로가 언제쯤 나타날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보인다”
“아직 더 가야 할 걸요”
나는 앞서가는 달림이를 말했고, 동생은 광주-양평간 도로를 말하고 있다.
“아니, 타켓!”

그래, 나는 잡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빨간 불빛들을. 결국 잡고 또 잡고 잡았다. 마라톤 35km 지점 이후 잡힐 때 느끼던 굴욕, 잡을 때 느끼던 보상심리....하지만, 오늘 난 눈에 보이는 모든 불빛을 잡아야만 목표한 시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거리와 시간이 명징하게 대응하지 않는 관계로. 마치 인수분해의 소거과정처럼, 나는 결론이 소수/등위로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100km에서는 시간과 거리가 대응하지 않는다! 결국 100km 와 나, 그 상관관계가 아직 설정되지 않았다. 대강이 그러하다. 그러니 따라잡는 길 밖에 도리가 없었다.

    <4악장-인류의 새벽>

81km 지점, 마지막 CP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9시간이 흘렀다. 이제 19km 남았다. 신들의 황혼을 거쳐 인류의 새벽으로 치닫고 있다. 스파르타슬론이라는 울트라마라톤은 밤을 세워 달린다는 점에서 확실히 신화적이고, 경계를 넘나드는 맛이 있다. 배번에는 각 CP를 통과한 4개의 도장이 찍혔다. 이제 골인만 하면 완주다.

“11시간 10분대에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요, 한 열명은 잡아야 할텐데....”
"잡을 수 있을까?”
“힘들어서 처지는 사람들이 많아요.”

탁구공만한 주먹밥을 몇 개 먹고, 오뎅국물을 마신다. 밤새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 고맙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밤을 세워가며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었던가? 동생이 가자고 한다.
“3분만.”
CP를 벗어나 교량 가장자리 턱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계획했던 3개피를 모두 피워서 지난번 슈퍼에서 사둔 것이다. 마지막 CP에서 쭈그리고 앉아 처연하게 불을 붙이겠다고.

  다시 뛴다. 다리가 무겁다. 발과 다리의 혈관들이 최대로 팽창한 느낌이다. 심장이 피를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속도를 높여간다. 길에선 더덕냄새가 난다. 며칠간 더덕을 깠더니 내 몸이 더덕에 반응하는 것인가? 확실히 스치는 바람에선 풀들과 신록의 냄새가 향긋하다. 새벽은 풀들의 냄새로 밝아온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는 풀들의 향기로 밝아온다. 해보다 먼저 눕고, 해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들.

  혼자 중얼거린다. 나는 머신이다. 러닝머신. 남은 10여km를 머신이 되어 달리자. 몸 상태를 점검해본다. 4분30초주로 딱 2km를 달릴 힘이 남아있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6분주로 남은 10여km를 갈 수 있을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언덕이 많은 곳이지만 가파르지는 않다. 밀어부친다. 앞서가는 불빛들을 하나둘 잡고 있다. 길에 차들은 없다. 커브에선 도로를 가로지르며 최단거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진 그저 한쪽 차선으로만 달려 왔는데, 1m라도 거리를 줄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뛰자니 신경이 쓰이고, 머리가 피곤하다.

  90km 지점을 지났다. 이제 남은 거리 10km. 동생이 1km 단위로 거리를 알려준다. 훈련코스라 거리를 꿰고 있다. 1km 단위로 거리를 인식하기 시작하자 1km가 멀다. 시계를 보는 횟수도 늘어난다. 9km, 8km, 7km, 거리는 줄어들고 있다. 쉬지않고 달리고 있다. 보이는 불빛들은 모두 추월했다. 추월하는 자 추월당하는 자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감정이 흐른다. 특히 추월당할 때의 느낌이란......, 난 펑펑 운다. 난 그렇다. 앞만 보고 달린다. 앞만 보고 달리다보면 뒤에서 누가 따라오고 있다는 의식이 전혀 없다. 더구나 내가 추월해 온 경우에는 그 간격이 더 벌어졌을 것이란 믿음이 자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추월해갈 때, 아....세상은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뒤에도 있었구나 하는 새삼스런 각성이 인다. 나만 치열하게 앞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누군가 나를 향해 치열하게 달려오고 있었다는 사실, 그게 놀랍다. 당연한데 나는 항상 그것에 놀란다.

 불빛들을 추월하면서, 울트라도 결국 달리기고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역시 치열한 게임이다. 영양을 쫒아 초원을 내달리는 초기 인류의 생존의 조건이었던 것이 장거리달리기였다고 하니, 어찌 치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존게임, 울트라마라톤.

  다시 분원리다. 이제 4km남았다. 96km를 달려오며 가장 놀란 건 나 자신에 대해서다.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목표를 세웠지만 이 길고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잘해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냈다. 이제 달려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물병에 든 마지막 물을 마시며 숨을 고른다. 이제 피날레다, 새벽을 뚫고 내려간다. 퇴촌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두 명의 사내가 불을 켜고 달려 내려오고 있다. 내려 가고 있는 것인지, 내려 오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여기서 나/그는 시점이 뒤엉킨다. 나는 그이고 싶다. 그는 황혼에 출발하여 어둠을 뚫고 새벽에 산정에서 귀환하는 영웅이오, 나는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골인지점에 있을 카메라앵글을 위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중늙은이일 뿐이다.

  골인! 사진을 찍고 막걸리를 한 잔 하는 사이 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만 남았다. 그리고 내 몸에서 철수다. 다시 실재의 사막이다. 루틴한 일상, 이제 어디로 달려가야 하나?

    덧붙이는 글

이 멋진 대회를 기획하고 준비해주신 모든 분들- 대회관계자, 자원봉사자 등-께 감사를 드리고, 함께 달린 240여 참가자분들에게도 우의를 보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했던 동생, 그리고 튼튼한 두 다리와 동생을 준 나의 부모님, 감사합니다. 아울러 집밖에서 온갖 실험들을 하면서 떠돌게 된 나의 운명/불행에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후기를 올리는 이유

  한 농부가 배를 타고 가다 조난을 당해 무인도에 조난을 당했다. 조난을 당한 사람은 농부와 신디 크로포드 단 두 명이었다. 농부는 신디와 섹스를 했다. 신디가 물었다. “좋았는가?”

농부는 답했다. “물론!” 농부는 또 말했다. “나를 더 행복하게 해 주려면 당신이 잠깐 내 친구 존의 역할을 해주면 고맙겠어” 신디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농부는 신디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존, 내가 지금 누구와 섹스를 했는지 알아? 바로 신디 크로포드란 말이야. 신디 크로포드” 그러며 농부는 행복하게 웃었다.-지젝의 농담중에서

아마도 후기를 올리는 이유는 그 농부의 심정일 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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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첫출전 경험담(소감)과 쓴소리 송육언2010/05/271668
18    [Re] 첫 울트라 완주를 축하드리며,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사무국2010/05/271135
17 천진암울트라 페마기(처녀출전 여성 2명) 한준기2010/05/271613
16 2부(몰핀보다 더 강한 나의 처방전) 최명은2010/05/261427
15    [Re] 후기 댓글 한준기2010/05/26928
14 1부(몰핀보다 더 강한 나의 처방전) 최명은2010/05/261415
13    [Re] 댓글 한준기2010/05/261059
12 두려움 반 설렘 반 천진암 65km 여정(제2회) 나종택2006/04/092354
11 자원봉사를 한 소감을 글로 썼어요. 이화연2005/07/262246
10 울트라에서 오르가즘을.... 조현세2005/06/052703
9 설마가...(완주기) 오병무2005/05/30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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